이번에 스페인 북동부에서 발생한 대규모 정전 사태는 단순한 지역적 발전량 부족이 아닌, 국가 전력망의 ‘물리적 연동성’에 대한 경고였다. 전력은 단순히 “있다/없다”의 문제가 아니다. 전력망 전체가 하나의 주파수(60Hz)로 맞춰 돌아가는 ‘동기 회전 시스템’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고 있다. 즉, 이번에 발생한 대규모 정전 사태는 단순한 풍력 출력 저하가 아닌, 전력망의 ‘보이지 않는 구조적 취약성’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이는 결코 남의 나라 일이 아니다. 우리 역시 재생에너지 확대에 속도를 내고 있지만, 그 전기를 수용할 전력망은 제대로 준비돼 있지 않다.
‘계통 주파수’란 무엇인가?
한국 전력망은 60Hz로 작동한다. 이는 발전소 내부의 회전자들이 일정한 속도로 돌아가면서 형성되는 일종의 ‘전기적 박자’다. 전력 수요가 공급보다 많아지면, 이 회전자들의 회전 속도가 느려지고 주파수가 떨어진다. 이 변화는 수 밀리초 안에 전국적으로 전파된다. 결국, 주파수는 ‘전력망의 체온’과 같고, 0.2Hz의 흔들림은 심장 리듬이 불규칙해지는 것과 같다.
스페인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인가?
카탈루냐 지역의 풍력 발전단지에서 갑작스러운 출력 저하가 발생했다. 재생에너지 비중이 높은 스페인 전력망은 이미 회전형 발전기의 비율이 낮아져 있었고, 충격을 흡수할 계통관성도, 급속 대응을 위한 예비력이나 ESS(에너지저장장치)도 부족했다. 그 결과, 전력망 전체 주파수가 급락했고, 수백만 가구가 전력 공급을 잃었다. 철도·통신·병원망이 일제히 마비됐다. 이는 단순히 전기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 부족이 “너무 급격하게”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미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2003년 북동부 정전
2003년 8월,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발생한 송전선 단락 하나가 캐스케이딩 현상(연쇄 고장)을 일으켜 미국과 캐나다 동부 8개 주와 주(州)를 마비시켰다. 5천만 명이 정전에 노출되었고, 경제적 피해는 수백억 달러에 달했다. 이 또한 하나의 단일 계통 시스템이었던 북동부 전력망이 주파수 충격에 대한 완충 능력을 상실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한국은 ‘단일 계통 + 중앙 집중 발전’ 국가다
한국 전력망은 ‘전국이 하나의 전기적 계통으로 연결된 ‘단일 계통 구조’다. 모든 발전기와 수요처는 동일한 주파수(60Hz)에 맞춰 동기화되어 있으며, 이는 전기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한 몸처럼 움직이는 시스템이다. 서울의 화력발전소가 정지해도, 부산의 주파수가 함께 떨어진다. 전북의 풍력 출력이 급락하면, 대전·강원의 발전기도 더 많은 부하를 느낀다. 더욱이 한국은 대형 석탄·원자력 발전소에 의존하는 중앙 집중식 구조이기 때문에,
단일 지점의 사고가 전국적 정전으로 연쇄 확산될 가능성이 존재한다. 즉, 우리 전력망은 효율적이지만, 매우 취약한 구조이기도 하다.
제주도는 예외인가?
그나마 제주도는 본토와는 직류(HVDC)로 연결된 ‘반독립형 계통’이다. 일시적으로는 계통에서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운전이 가능하고, 전력 충격도 본토에 직접 전달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만큼 전력 수급 자율성도 낮고, 자체 관성도 매우 약한 편이라 추가적인 제어 설비와 ESS 의존도가 높다.
에너지 정책은 과학을 전제로 해야 한다
우리는 재생에너지 확대에 속도를 내고 있지만, 전력망의 본질은 “눈에 보이지 않는 물리 시스템”이다. 친환경이 곧 안정은 아니다. 주파수는 동기화되어야 하며, 충격은 흡수할 수 있어야 하며, 사고는 확산되지 않도록 제어되어야 한다.
스페인, 미국, 그리고 우리가 가는 길은 연결돼 있다. 정책을 세우는 정치인뿐 아니라, 투표하는 시민도 전력망을 이해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기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모든 삶을 떠받치고 있다.
오늘날 한국에서도 유사한 ‘무형의 전력망 위기’가 일어나고 있다. 특정 시간대 전남·제주 등에서 태양광 전력이 폭증하지만, 이를 수용할 전력망의 송전 용량과 계통 제어 능력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결국 전기는 ‘있는데도’ 계통이 이를 감당하지 못해 출력을 강제로 줄이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는 스페인 정전 사태와 구조적으로 같은 문제다. 즉, ‘전기 생산’만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받아내고 흘려보낼지’가 더 중요한 시대다.